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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색을 패션에 처음 도입한 패션의 아이콘

by Mocarain 2023. 9. 22.

실제-퐁피두-부인-초상화
마담 퐁파두르

이 초상화 많이 보셨을 겁니다.   짙은 녹색의 드레스색과 대비되는 화사한 볼화장, 발그레한 입술, 구두, 목에 두른 리본, 옷에 장식된 화려한 꽃자수와 리본이 모두 같은 색상으로 깔맞춤  한 여인의 초상화 - 매우 세련되고 우아한 그녀가 누구인지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I트렌드를 선도했던 패션의 아이콘

예술적 안목이 매우 뛰어났으며 문화, 예술, 학문의 후원자였고 패션, 미술, 연극, 도자기, 보석등에 관심이 많아 해당 산업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그녀는 패션이나 헤어스타일 분야에서는 당대 귀족사회의 유행을 선도했습니다. 위의 초상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핑크색 리본을 포함해 꽃장식의 색감이 화사한 파스텔톤으로 화려합니다. 그 시절에도 핑크색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색과 겉도는듯한 칙칙한 핑크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담 퐁파두르  는 최초로 화사한 핑크색을 의상에 도입했으며, 얼굴 화장에도 화사함을 더한 핑크를 사용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딴 색안료를 개발하기까지 합니다.  바로 퐁파두르 핑크! 칙칙한 핑크가 아닌 화사하고 사랑스러운 핑크색을 개발까지 한 그녀!

 

또한 이 시기에 그려진 로코코 미술작품에선 예전에 비해 파스텔톤의 화사한 색감을 쓴 작품들도 많았습니다.  새로운 핑크를 곁들인 그녀의 패션이 미술계와  유럽의 화장법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니 대단합니다.

 

그녀는 모든 연극의 대사를 암송할 수 있었고, 악기도 잘 다루었으며, 열정적인 정원사이자 식물학 자였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그림을 자주 그렸고, 보석 디자인을 하기도 했으며, 훌륭한 유머 감각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다양한 예술적 취미는 프랑스의 문예를 진흥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으며, 극장이나 소극장의 건립은 물론 당대의 예술가들도 모두 퐁파두르 여후작의 후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녀가 비록 루이 15세의 정부였지만 그녀의 타고난 탁월한 예술적 감각은 폐쇄된 그 시절을 뚫을 만큼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낸 시대의 아이콘이자 인플루언서였던 것입니다.

 

I소개

1. 이름도 멋지게 들리는 퐁파두르 

잔앙투아네트 푸아송 드 퐁파두르 여후작(1721년 12월 29일 - 1764년 4월 15일)은 프랑스의 왕 루이 15세의 여러 애첩 중에 가장 많은 총애를 받았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아래의 핑크핑크한 초상화의 여인이 바로 루이 15세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 '퐁파두르 부인'입니다. 그녀를 루이 15세의 애첩으로만 기억하기에는 아까운 면이 너무 많습니다. 이유는 그녀가 프랑스 문화에 끼친 영향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입니다.

 

2. 루이 15세의 막후 실력자:정치와 외교에 적극 관여한 비선실세

1745년에 루이 15세의 공식 정부가 되었으며, 이후 약 15년 넘게 정치와 외교분야에 매우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이를 통해 비선실세이자 막후실력자로서 수상에 준하는 지위를 누렸다고 합니다.

 

3. 간략한 그녀의 생애

1721년 당시 파리의 부유한 금융업자였던 샤를 프랑수아 폴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741년에 그녀는 아버지의 조카, 즉 자신의 사촌인 샤를 기욤 르 노르망 데티올과 결혼하여 '잔느 앙트와네트 데티올'로 이름을 바꾸고 딸 '알렉상드린'을 낳았습니다. 루이 15세와의 인연은 1744년에 가끔 수렵을 하러 오던 루이 15세에게 아름다운 미모가 눈에 띄어 내연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녀는 여후작의 작위가 주어져 귀족으로 신분이 격상되었으며, 남편과 이혼하여 1745년 9월 14일 정식으로 왕의 정부로 인정되며 루이 15세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됩니다.  평민출신이었던 그녀는 자신의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고 하보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루이 15세에게  절대적 영향력 행사했으며, 돈을 물 쓰듯 하는 사치도 심해  여러 곳에 저택과 성곽 등을 건축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프랑스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 중인 엘리제궁도 그녀의 저택 중 하나입니다. 이곳은 루이 15세가 그녀에게 선물한 궁전입니다.

 

그녀는 가구나 도자기, 그릇, 의상, 보석, 그림, 책 등 많은 수집품을 모았는데, 그녀가 갑작스레 1764년 4월15일 43살에 죽은 뒤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는 데에만 1년이나 걸렸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고 합니다.  ‘우아한 부인은 당대의 모든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고 묘사한 당시 기록에도 적혀 있듯, 그녀의 이러한 수집열은 각종 미술품의 생산을 촉구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프랑스가 예술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만드는데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루이 15세는 그녀가 43살에 폐결핵으로 죽을 때까지 총애했다고 합니다. 그녀가 죽던 날 1764년 4월 15일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는데, 루이 15세는 "여후작이 떠나기엔 좋지 않은 날씨군..."이라고 얘기했다고 하며, 비를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녀는 행복했을까요?

시대의 트렌드를 선도하고 현재의 프랑스 문화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던 마담 퐁파두르!